제1비가
내가 이렇게 소리친들, 천사의 계열 중 대체 그 누가
내 목소리를 들어줄까? 한 천사가 느닷없이
나를 가슴에 끌어안으면, 나보다 강한 그의
존재로 말미암아 나 스러지고 말 텐데. 아름다움이란
우리가 간신히 견디어내는 무서움의 시작일 뿐이므로.
우리 이처럼 아름다움에 경탄하는 까닭은, 그것이 우리를
파멸시키는 것 따윈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천사는 무섭다.
나 이러한 심정으로 어둡게 흐느끼는 유혹의 소리를 집어삼키는데,
아, 대체 우리는 그 누구를 필요로 하는가?
천사들도 아니고 인간들도 아니다.
영리한 짐승들은 해석된 세계 속에 사는 우리가
마음 편치 않음을 벌써 느끼고 있다. 우리에게 산등성이
나무 한 그루 남아 있어 날마다 볼 수 있을지 모르지.
하지만 우리에게 남은 건 어제의 거리와, 우리가 좋아하는
습관의 뒤틀린 맹종, 그것은 남아 떠나지 않았다.
오 그리고 밤, 우주로 가득 찬 바람이
우리의 얼굴을 파먹어 들어가면, 누구에겐들 밤만이 남지 않으랴,
그토록 그리워하던 밤, 쓸쓸한 이의 가슴 앞에 힘겹게 서 있는,
약간의 환멸을 느끼는 밤. 밤은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더 쉬울까?
아, 그들은 그저 몸을 합쳐 그들의 운명을 가리고 있구나.
너는 아직 그것을 모르는가? 우리가 숨쉬는 공간을 향해
한 아름 네 공허를 던져라. 그러면 새들은
더욱 당차게 날갯짓하며 넓어진 대기를 느낄지도 모를 일이다.
... ...
제4비가
오 생명의 나무들이여, 너희들의 겨울은 언제인가?
우리는 하나가 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철새떼처럼
서로 통하지 못한다. 너무 앞서거나, 뒤처져 가다가
우리는 갑자기 바람 속으로 밀치고 들어가
느닷없이 무심한 연못속으로 곤두박질친다.
피어남과 시듦을 우리는 한꺼번에 알고 있다.
그리고 어딘가 사자들이 어슬렁거리며 가리라, 그들의
위엄이 살아있는 한, 노쇠 따위는 모르는 채.
그러나 우리가 전적으로 한가지를 말하는 순간, 우리는
벌써 다른 것의 당김을 느낄 수 있다. 적대감은
항상 우리 곁에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서로 안에서 절벽 쪽으로 다가가고 있지 않은가.
널찍한 공간과 사냥과 고향을 서로 약속한 그들이?
한순간에 그리는 스케치에도
공들여 반대 바탕이 마련될 때,
우리는 그 그림을 볼 수 있다 ; 인간들은 분명함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감정의 윤곽을 알지 못한다 :
다만 바깥에서 그 윤곽을 만드는 그 무엇을 알 뿐이다.
자신 마음의 장막 앞에 불안감 없이 앉아본 자 누구인가?
장막이 올라갔다 : 그곳엔 이별의 장면이 있었다.
금방 알 수 있었다. 눈에 익은 정원이었다, 정원이
조금 흔들렸다: 이어서 먼저 남자 무용수가 등장했다.
그 "남자"는 아니다. 됐다! 그의 몸짓이 아무리 날렵해도,
그는 변장한 무용수일 뿐, 앞으로 한 사람의 시민이 되어
부엌을 지나 거실로 들어갈 것이다.
나는 반쯤 채워진 이 가면들을 원치 않는다,
차라리 인형이 좋다. 인형은 가득 차 있다. 나는
속을 채원 몸통과 철사줄 그리고 외관뿐인
그 얼굴 정도는 참을 수 있다. 여기. 나는 기다리고 있다.
조명이 나간다 해도, 누가 내게 '이젠 끝났어요'라고
말한다 해도, 휘익 불어오는 잿빛 바람에 실려
무대로부터 공허함이 내게 밀려온다 해도,
말없는 나의 선조들 중 어느 누구도
더 이상 내 옆에 앉아 있지 않다 해도, 어떤 여자도,
심지어 갈색의 사팔뜨기 눈을 한 소년마저 없어도,
나는 그 자리에 앉아 있으리라. 구경거리는 아직도 있다.
(중략)
... ... 라이너 마리아 릴케
p.s. 마음이 걷는 길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외려 더욱 선명하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오늘, 지리한 장마가 수그러들고 푹푹 찌는 한여름 날씨, 그래도 하늘만큼은 청파란 바다여서 시원해 뵈는 날. 양산으로 덮어도 좋을 큼지막한 플라타너스 잎이 파란 하늘 아래서 푸른 깃발처럼 남실거립니다. A4 30p 분량의 교정작업을 앞에 두고 제 마음은 푸른 바다로 이어진 그 길을 따라 홀연히 가버렸습니다.
책 속의 귀한 말...
책꽂이에 꽂혀 있는 릴케의 시집과 중,단편 소설들은 다른 어느날 보다도 이렇게 마음이 홀연한 날 생각이나 펼쳐보게 됩니다.
아스라한 현실 문 앞에서 하늘 또는 존재의 심연으로 이어진 널판지 층계를 천천히 걸어 오르는 것 같은 그의 글들은 제게는 또 다른 마음의 길이 되어줍니다.
오후의 대기는 세상을 실컷 휘돌며 넘실대다 지붕에 올라 앉아 쉬는 양 한가롭습니다.
이렇게 눈부신 햇살 속으로 한차례 소나기기 쏟아진다면 술래 먹고 쉬고 있는 오후의 대기를 골려주려는 하늘의 장난질로 여겨질 것 같습니다.
여유를 부리고 싶은 마음은 없었는데 좋은 음악 몇 곡 듣고 자꾸만 창 밖을 보다가 저도 모르게 그만 마음이 옆 길로 새버렸습니다.
마음으로 걷는 산책은 그리 복잡하고 어렵지 않아 좋아요.
잠깐동안이지만 자신의 마음을 풍요하게 만들어 주는 이러한 여유가 제게는 휴양지에서 보내는 휴가보다도 더 달콤합니다.
릴케가 걸었던 그의 심연 속 산책을 잠시간만이라도 함께 걸어보세요.
그와 걷고 싶지 않다면, 당신만의 산책을 가는 것도 좋겠지요.
이 짧막한 글은 다른 존재의 마음길로 이르는 웜홀일 수 있습니다.
좋은 글과 음악은 평생 친구라는 말에 한표, 던지면서.
제 여유는 여기까지. 이제 작업해야 겠습니다.
어쨌든, 그래도 오랫만에 오후를 나눠 갖는 것. 즐거운 일이네요.
... ...
'국외문학작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윌리엄 브레이크(William Blake) - '순수의 전조' (0) | 2006.09.04 |
---|---|
가을 날 / 라이너 마리아 릴케(음악/2nd Moon의 얼음연못) (0) | 2006.09.03 |
무료로 영어소설 읽기 (0) | 2006.08.04 |
그림으로 보는 맥베스 (0) | 2006.07.20 |
이자벨라의 전설 (0) | 2006.07.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