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문번역
At peace
Cherish righteousness, o judges of the earth, o judges of the earth.
The souls of the righteous are in the hands of God, and the torment of death will not touch them.
In the sight of the unwise they seemed to die, and their departure is taken for misery -- but they are at peace.
The ungodly ruler has no hope, and even if he lives long, he shall be regarded as nothing.
But the just prince, the just prince, he is at peace -- at peace.
평화 속에
친애하는 정의여,
오, 대지의 심판관이시여, 대지의 심판관이시여,
고결한 영혼들은 하느님의 품 안에 머물며,
죽음의 고통이 그들을 괴롭히지 못하나니,
어리석은 자의 눈에는 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죽음이 불행인 것처럼 생각되겠지만,
그러나 그들은 평화 속에 있도다.
저 잔혹한 통치자에게는 희망이 없으리.
비록 그가 오래 산다고 해도 그는 허무와 같으리.
그러나 정의로운 왕자여, 정의로운 왕자여,
그대는 평화 속에 있으리. 평화 속에 있으리.
- 햄릿 왕자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
햄릿 (1996/미국, 영국)
Haml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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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케네스 브래나 Kenneth Branagh
주연
케네스 브래나....햄릿
Kenneth Branagh....Hamlet
데릭 제이코비....클로디어스
Derek Jacobi....Claudius
줄리 크리스티....거트루드
Julie Christie....Gertrude
케이트 윈슬렛....오필리아
Kate Winslet....Ophelia
리처드 브라이어스....폴로니어스
Richard Briers....Polonius
니콜라스 패럴....호레이쇼
Nicholas Farrell....Horatio
1.
케네스 브래나의 [햄릿]은 '큰 영화'입니다. 이렇게 큰 영화는 이 비디오 시대에 참 드물죠. 70밀리 화면에 4시간의 상영시간 그리고 엄청난 캐스팅. 일반 상업영화에서는 어림없는 이 시대착오적인 거대함은 모두 케네스 브래나라는 인물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 거대함은 영화관에서나 제대로 맛볼 수 있습니다. 슬프게도 우린 그런 경험을 할 수 없었습니다. 국내 비디오 출시분은 거의 절반이나 삭제된 불구이며, 캐치원에서 방영된 것은 러닝타임은 그대로지만 팬앤스캔 버전입니다. 게다가 2부를 이틀에 걸쳐 방영하는 통에 스토리의 맥을 끊어놓았지요.
하여간 브라운관으로 보는 [햄릿]은 아주 갑갑합니다. 특히 화면이 어떤 장대함을 의도할 때 그렇지요. 게다가 팬앤스캔 버전은 몇몇 중요한 영화적 트릭을 뭉개버립니다. 예를 들어 갑작스러운 햄릿의 첫 등장과도 같은 것 말입니다. 햄릿이 '죽느냐 사느냐'의 그 유명한 대사를 할 때도 화면 구도가 아무래도 어색합니다. 브래나가 어떤 걸 의도했는지는 저희도 모르겠어요.
기왕 여러번 재방송을 해야 하는 입장인 케이블 방송이라면, 레터박스 판과 팬앤스캔 판을 함께 준비해서 시청자들에게 선택하게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2.
우선 당위성에 대해 묻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과연 [햄릿]을 꼭 무삭제로 만들어야 했을까요?
그럴 가치는 있습니다. 텍스트를 모두 살리면 셰익스피어의 원래 의도에 보다 가까이 접근할 수 있습니다. 셰익스피어 추종자라면 한 번쯤 해 볼 만한 일이죠. 게다가 긴 러닝타임은 캐릭터들에게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을 줍니다. 이 무삭제 버전에서도 클로디어스나 거트루드와 같은 인물들의 깊이는 다른 버전보다 훨씬 깊습니다. 잔가지를 그대로 살렸기 때문에 내용의 거대함도 그대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텍스트를 그대로 살리는 것은 상당히 많은 문제점의 원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선 [햄릿]이 희곡이지 영화 각본이 아니라는 것을 지적해야 할 것 같습니다. [햄릿]은 기본적으로 대사를 읊어대는 배우들을 위한 작품입니다. 원작을 그대로 살린다면 우린 끊임없이 대사를 주절거리는 배우의 얼굴밖에 보지 못합니다. 무대 위에서야 상관없지만 영화관 스크린에선 이 대사 낭송의 체감 길이가 훨씬 기니까 곤란해집니다.
케네스 브래나 역시 그 문제점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는 어떻게든 비주얼로 그 길이를 극복하려고 합니다. 찰턴 헤스턴이 트로이의 몰락을 장엄하게 읊을 때를 보세요. 영화의 기본 내용과 전혀 상관없는 부분이지만, 브래나는 존 길거드와 주디 덴치라는 거물 배우들을 동원해서 그 장면을 정말로 재현해 삽입합니다. 이 영화엔 구체적인 삽입 장면과 회상 장면들이 지나치게 많은데, 그 중 상당수는 긴 대사 길이를 커버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스토리의 순서를 그대로 살린다는 것도 문제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감독에게 비주얼과 리듬의 자유를 충분히 허락하지 못하는 거죠. 다시 그 '죽느냐, 사느냐'의 대사를 보죠. 원작에서 이 대사는 햄릿이 오필리아를 만나는 장면과 그대로 이어집니다. 로렌스 올리비에나 프랑코 제피렐리는 이 대사를 따로 떼어내서 적당히 독립된 공간에 배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케네스 브래나에겐 그런 권한이 없었죠. 그는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찾아냈지만 그게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 저흰 알 수 없습니다. 크로핑된 화면과 아이디어를 보고 대충 짐작만 할 뿐이죠.
3.
케네스 브래나의 햄릿은 로렌스 올리비에의 햄릿처럼 심각하게 고뇌만 하는 지식인의 상징이 아닙니다. 그 역시 고민 많은 친구이긴 하지만 훨씬 에너지에 넘치고 생기발랄하며 진짜로 좀 미쳤습니다. 뭐, 보다 브래나 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원작에 더 가까워진 거라고 할 수도 있어요. 우리가 맘 속에 품고 있는 햄릿의 상은 대부분 19세기 로맨티시스트들에 의해 창조된 것이니까요. 올리비에의 햄릿은 여기에 약간의 정신분석을 첨가한 20세기 버전이었고요.
브래나는 [햄릿]이 원래부터 가지고 있었던 극적 구조를 재발굴해서 다시 전면으로 끄집어 냈습니다. 그의 영화는 '죽느냐 사느냐'를 되풀이 하는 남자의 머리 속에서 탈출했습니다. 드라마는 확대되고 새 의미가 추가됩니다. 그것들은 브래나가 만든 것들이 아닙니다. 바드 영감이 원래부터 떠들고 있었는데 우리가 '죽느냐 사느냐'에 한눈 파느라 놓치고 있었던 것이죠. 다시 원래 사이즈를 회복한 클로디어스를 통해 우리는 양심과 권력의 문제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하게 됩니다. 폴로니어스의 확장된 모습을 보는 동안 그 불쌍한 바보에 대한 우리의 연민은 강화됩니다. 거트루드 역시 외디푸스 콤플렉스의 대상을 넘어서며 오필리아도 들라크로와의 그림에 나오는 물감 조합이 아닙니다. 이 피가 끓는 인간들이 부대끼며 죽어가는 동안, 우린 우리가 놓치고 있었던 이 복수극의 열정을 재발견하게 됩니다. 여기서 브래나는 한 점 땄습니다.
그러나 영화는 어딘가 뻣뻣한 느낌도 듭니다. 그건 바드 영감에 대한 브래나의 존경심이 지나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의 스타일 때문이기도 합니다. 브래나의 스타일은 하도 단도직입적이어서 가끔 거의 순진하다는 느낌까지 주는데(그러나 그런 스타일이 바로 그의 영화들을 특징짓는 오페라적 화려함의 원천이라는 것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런 몰아붙이기 방식은 [헨리 5세]나 [헛소동]같이 간결한 작품에서는 성공적이었지만 [햄릿]과 같이 복잡한 작품에서는 조금 겉도는 느낌이 듭니다. 결말도 조금 힘이 딸리고 산만하다는 느낌을 주는데, 이건 호흡 조절에 실패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적어도 클로디어스의 죽음에 시간과 공간을 더 할애했었으면 나았을 걸 그랬습니다.
4.
이 영화에 나오는 배우들은 대충 셋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케네스 브래나의 고정 패거리 (햄릿 선왕 역의 브라이언 블레스드, 폴로니어스 역의 리처드 브라이어즈, 클로디어스 역의 데릭 제이코비, 호레이쇼 역의 니콜라스 파렐, 레어티즈 역의 마이클 멀로니... ) 2. 거물 배우들의 깜짝 카메오 (오즈릭 역의 로빈 윌리엄즈, 레이날도 역의 제라르 드파르디외, 무덤 파는 일꾼 역의 빌리 크리스탈, 왕역 배우 역의 찰턴 헤스턴, 영국 대사 역의 리처드 어텐보로, 마르셀러스 역의 잭 레먼...) 3. 그리고 원래 역을 위해 선정된 배우들(오필리아 역의 케이트 윈슬렛, 거트루드 역의 줄리 크리스티, 포틴브라스 역의 루퍼스 슈얼...)
가장 거슬리는 경우가 많은 건 2번 부류입니다. 마르셀러스나 레이날도 같은 역들은 전혀 거물을 써야 할 필요가 없는 역이라서 레몬이나 드파르디외 같은 거물이 그 역을 하니까 괜히 튀기만 합니다. 그러나 찰턴 헤스턴은 아주 근사하게 폼을 잡고 빌리 크리스탈도 무덤 파는 일꾼 역에 잘 맞습니다.
가장 매끄럽게 앙상블을 이루는 배우들은 1번 부류입니다. 거물 배우가 아니라 거슬리지도 않고 다들 브래나가 어떤 감독인지 알고 있어서 술술 잘 해냅니다. 게다가 데릭 제이코비는 그 이상을 보여줍니다. 그가 연기하는 클로디어스는 이미 악역의 범위를 넘어설 만큼 깊이가 있습니다.
가장 효과적인 배우들 2명은 3번 부류에 속해 있습니다. 너무 근사하게 나이를 먹은 줄리 크리스티는 아름답기도 하지만 화면에 굉장히 강한 존재감을 부여합니다. 케이트 윈슬렛은 오필리아를 '진짜 육체' 안에 밀어 넣습니다. 지나치게 멜로드라마틱하다고 생각하는 관객들도 있겠지만 브래나의 영화엔 잘 맞습니다. 하여간 윈슬렛의 오필리아는 이 영화에서 가장 성공한 우상 파괴의 예입니다 (창백한 로맨티시스트들이여, 안녕!)
그렇다면 브래나는? 그는 브래나입니다. 그는 영화와 너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와 영화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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