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Eminem B.C. Showcase
<8 마일>
감독: 커티스 핸슨 음악: 에미넴 외 출시: Universal 평점: ★★★★
'랩배틀’이 열리는 지하 클럽의 화장실 구석에서 거울을 바라보며 래핑 연습에 몰두하고 있는 백인 소년은 지미 ‘래빗’ 스미스다. 아니다. 래빗의 탈을 쓴 에미넴이다. 귀에 이어폰을 꽂은 그는 정신없이 래핑 연습 중이다. 이 장면에서 커티스 핸슨은 ‘프로’ 에미넴에게 ‘초짜’처럼 보이도록 지시했겠지. 이어폰 속 음악이 관객의 귀를 가득 채우는 대신 스크린 안의 모든 것은 한 템포씩 움직임을 늦추고 입을 다문다. ‘마임’의 진공적인 대기를 가득 채우는 것은 몹 딥(Mop Deep)의 “Shook ones pt. 2”. ‘랩 파이터(rap fighter)’가 처녀 배틀 직전에 듣는 음악치고는 고약하다. 랩 배틀 용어로 ‘shook one’은 무대 공포증 때문에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반 벙어리가 되는 랩 파이터들을 일컫는 경멸적인 호칭이기에.
래빗, 아니 에미넴은 더러운 거울 속의 얼굴을 바라보며 몹 딥을 립싱크 하면서 래퍼 모션(허공에 손 내려 꽂기)을 점검한다. 래빗의 순수하고 필사적인 욕망도 힙합의 리듬과 모션에 의해 분절된다. <성난 황소(Raging Bull)>의 ‘셰도우 복싱’ 장면을 연상케 하는 이 아름다운 장면은 에미넴이라는 ‘스타 시스템’에서는 구경하기 힘든 것이다. 아니다, 이렇게 말해야 한다. 나는 한 번도 이 같은 컨셉의 ‘에미넴 쇼(Eminem Show)’를 본 적이 없다. ‘힙합 계의 카트만’으로 금세기 최고의 팝 아이콘으로 기록될 에미넴은 이번 ‘쇼’에서 힙합계의 순수한 ‘록키(!)’로 분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자전적’이란 말은 얼마나 모호하며 매혹적인가. 천하의 악동인 그에게도 저런 순수한 시절이 있었다. 아니다. 가면을 쓸 필요가 없는 백스테이지에서의 에미넴은 여전히 지미 래빗일지도 모른다. 이제 나에게 <8 마일>은 커티스 핸슨이 오랫동안 염원했던 ‘힙합 영화’가 아니라 마샬 매더스(에미넴의 본명)의 청춘기를 그린 ‘의사’ 다큐멘터리(pseudo-documentary)다. 물론 이것은 신화의 메커니즘에 휘말린 관객의 환상에 불과하다. 열 적어진 나는 환상을 수습할 겸 ‘의사 다큐멘터리’와 ‘다큐멘터리’간의 간극이란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고 얼버무린다. 간극이 있다면 기획성과 현장성의 양적 차이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하고. 다큐멘터리가 가지고 있다는 날 것으로서의 진실성이란 환상이다.
한 인터뷰(스페셜 에디션 사운드트랙에 실려있다)에서 에미넴은 래빗이 되기 위해 “가능한 한 非 에미넴처럼 굴었다”고 말했다. <8 마일>을 보고 래빗과 에미넴을 동일시할 대중들의 ‘자연스러운’ 반응에 대해 그는 “그것에 대해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바가 도대체 어디 있겠어?” 라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비록 <8마일>이 에미넴의 실제 과거와 상당 부분 닮아있는 것이 사실이어서 “스타 에미넴의 전기(前期)같은 영화”라고 덧붙이긴 했지만.
천재적인 라이밍 감각, 비스티 보이즈(Beastie Boys)의 킹 애드록(King Ad-Rock)처럼 한 번 들으면 잊을 수 없는 독특한 음색. 거기에 불행한 청소년 기와 부조리한 제도와 세상에 대한 신랄한 기억력까지. 스타의 모든 것을 갖춘 에미넴은 미국의 모든 현상과 주의(-ism)와 ‘정치적 윤리의식(politically correct)’을 힙합이라는 ‘회칼로’ 난도질하며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이정엽(음악 평론가)은 에미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에미넘이 '팝'의 왕자로 등극했다는 사실이 힙하퍼로서 그의 정체성에는 아무런 손상을 가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퍽이나 흥미롭다.” 그렇다. 역설이지만 그것은 어떤 형태의 ‘진의’도 미디어에게 포착당하지 않는 에미넴만의 쇼맨쉽에서 연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8마일>에서 보인 순도 백 퍼센트의 진정성이 ‘쇼맨’ 에미넴의 실재와 갈등 없이 합일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각설하고. 에미넴은 촬영 틈틈이 촬영 현장 한 쪽에 마련된 뮤직 트레일러 세트에 들어가 <8마일>을 위한 음악을 만들었다. 그가 중점을 둔 것은 충실한 서브 텍스트로서의 음악 대신 <8 마일>에 대한 '쇼 케이스’음악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Lose Yourself” “8 Mile”을 제외한 전부가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 힙합 넘버들이다. 단, 여기 저기서 꿔온(?) 것이 아니라 <8 마일>을 위한 ‘신곡’을 채웠다. 그 중 오비 트라이스(Obie Trice), 50 센트 (50 Cent), 디 트웰브(D 12)는 ‘셰이디(Shady)’ 소속 뮤지션들로 셰이디는 에미넴이 대부(?) 닥터 드레(Dr. Dre)에서 독립한 후 설립한 자주 레이블이다. “Lose Yourself”의 빅 히트와 함께 상당히 팔렸으니 소속 뮤지션들의 홍보에 있어서도 상당한 시너지 효과를 거뒀으리라.
영리한 비즈니스 맨 에미넴.
내가 꿈꾼 <8마일> 사운드트랙은 내용물이 달랐다. 영화 내의 생생한 랩 베틀 장면들과 함께 고물차를 수리하는 동안 에미넴과 메키 파이퍼가 힙합 넘버로 즉석 리메이크한 “Sweet Alabama”가 고스란히 들어있는 ‘사운드트랙’을 듣고 싶었다. 할 수 있다면 래빗 패거리들의 실 없는 재담도. 마치 <빌리 엘리어트>의 사운드트랙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8 마일> 사운드트랙이 소장 가치가 뛰어난 힙합 컴필레이션이라는 점에는 적극 동의한다.
힙합 워너비들에겐 ‘패거리 송가’처럼 들릴 “Lose Yourself”에 대한 부연이 필요할까? 애상적인 피아노 인트로 이후 미드 템포로 '걸어가다' 록의 동력으로 휘몰아치는 이 음악은 어떤 것이 에미넴을 ‘현상’이자 ‘아이콘’으로 만들었는지를 이해하게 만든다. 래빗이 버스를 타고 황량한 8마일 구역을 지나가며 라이밍(rhyming)에 골몰하는 장면에서 흘러 나오는 “8 Mile”은 라임 솜씨와 함께 음울한 정서가 매혹적인 이 앨범 최고의 넘버다. 인트로에서 들려오는 기차의 고동 소리가 사라지면 싱코페이션 비트와 재지(jazzy)한 피아노 연주가 서서히 질주하는 기차바퀴의 질감으로 진행된다. 여기에서의 에미넴의 라임은 가차없이(?) 정격한데 그 철벽 같은 통제력 안에서 지미 래빗의 공격적 절망을 ‘조용히’ 폭발시킬 수 있다는 것이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조성과 무드에 있어서 지미 래빗의 ‘오페라’라고 여겨질 정도로 드라마적인 “Rabbit Run”도 멋지다(사족. 슬림 셰이디(Slim Shady: 에미넴의 음악적 얼터에고)는 에미넴의 동의어였지만 <8 마일> 음악에선 '슬림 셰이디를 벗고 철저하게 지미 래빗의 페르소나가 되어 가사를 썼다'고.)
에미넴 소속 뮤지션들의 음악에서 ‘네그리튜드(Negritude. 아프로-아메리칸의 문화)’를 만끽하는 것도 근사하지만 라킴(R.A.K.I.M.), 나스(NAS), 메이시 그레이 등 힙합과 알앤비의 ‘거성’이 들려주는 그루브한 감성들 역시 발군이다. 절대 놓치지 마라!
손바닥은 땀으로 번들거려, 무릎엔 힘이 없어, 두 팔은 무거워, 스웨터에 토한 얼룩이 다 보여, 엄마가 해 준 스파게티,초조하지만 겉은 멀쩡해. 이젠 폭탄을 투하해야지, 하지만 자꾸만 가사를 까먹네, 사람들은 고래고래 떠들어대고,입을 떼긴 뗐는데 찍 소리도 못하네, 목은 메이는데, 허허, 이제 모두가 놀려대네, 시계는 돌아가고, 시간이 다 됐네, 그만~! 이제 현실로 돌아가,우우우, 갑자기 중력이 느껴지네, 우우우, 저기 래빗이 간다. 쫄아서 한 마디도 못한 놈, 환장해 돌아가시겠지, 천만에, 그냥 때려치우는 게 낫지 않겠어? 아냐! 절대로 그럴 수 없어, 걔도 알아, 자기가 실패의 밧줄에 꽁꽁 묶여 있다는 걸, 상관없어, 걘 머저리잖아, 걔도 알아, 하지만 속수무책의 신세, 그걸 알아서 그앤 그렇게 슬픈거야, 이동형 집구석으로 돌아가자마자, ’연구실’에 처박혀, 요! 그 빌어먹을 ‘랩’ 때문이지, 그 순간을 꽉 잡아 절대 빠져나가지 않기를 바라면서 말이야…
-“Lose Yourself” 중
1. Lose Yourself - Eminem 2. Love Me - Eminem / Obie Trice / 50 Cent 3. 8 Mile - Eminem 4. Adrenaline Rush - Obie Trice 5. Places to Go - 50 Cent 6. Rap Game - D12 7. 8 Miles and Runnin' - Jay-Z / Freeway 8. Spit Shine - Xzibit 9. Time of My Life - Macy Gray 10. U Wanna Be Me - Nas 11. Wanksta - 50 Cent 12. Wasting My Time - Boomkat / Taryn Manning 13. R.A.K.I.M. - Rakim 14. That's My N**** Fo' Real - Young Zee 15. Battle - Gangstarr 16. Rabbit Run - Emin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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