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5월, 내셔널 지오그래픽 뉴스는 전세계의 해저 유적을 특집으로 다루면서, 특히 쿠바 서쪽 해저의 유적의 존재에 대해 초점을 맞춥니다. 이 뉴스를 보고 관심을 갖게 된 캐나다의 탐사회사 ADC(Advanced Digital Communition)와 초고대문명 연구를 주도해온 모린 연구소(Morien-Institute)는 쿠바 국립역사박물관 소장인 마누엘 이투랄데-비넨트(Manuel Iturralde-Vinent)박사와 함께 이 유적을 본격적으로 합동 탐사하기로 합니다.
이 거석 유적(Megalith)은 약칭 'MEGA'라 부르며(지도상에 이 약호로 나타남), 2002년 6월에 본격적인 조사작업에 나섭니다. 그 결과물(사진자료, 지도 등)을 아래 소개합니다. 이 유적들은 쿠바의 최서단 과나아카비베스 반도와 유카탄 반도 사이, 수심 약 600~750m의 해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다른 해저 유적과 달리 잠수부의 접근 및 찰영이 불가능하여 본격적인 규명까지는 상당한 추가 비용과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보입니다.
1900년대 초, 유명한 예언가 에드가 케이시(Edgar Cayce, 1877~1945)는 1968년에서
1969년 사이에 아틀란티스의 일부가 떠오른다고 예언했습니다. 그의 다른 예언들의 정확성에 깊은 신뢰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이 시기가 되자
대서양을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1968년 버뮤다 군도의 일부에서 해저 융기 현상이 관측되었고, 그 결과 1969년 바하마의 비미니
섬 해저에서 맨슨 발렌타인(J. Manson Vallentine)박사에 의해 인공적인 것으로 보이는 석조 유적이 발견되기에 이르러 세상이 발칵
뒤집힙니다.
(버뮤다 인근 지도. 유적이 발견된 비미니 섬은 마이애미에서 버뮤다 군도의 최서단으로, 마이애미에서 50마일
거리)
사진#1
코스타리카 산호세 시 국립박물관 정원에 전시된 석구들
1970년대 에리히 폰 대니켄의 <신들의 전차>가 출간된 이후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졌고,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에 아틀란티스 후계문명 관련서들이 봇물처럼 쏟아져나올 때 다시 각광을 받았던
유물입니다.
그러나 이 유물들은 1970년대 이후 ‘발견’된 것이 아니며, 그 이후에 비로소 학술적 연구가 이루어진 것도 아닙니다.(대니켄과 일부 함량미달 초고대문명 연구가들의 오도에 의해 부풀려진 측면 있음)
이 석구들이 처음 발견된 것은 1940대의 일로, 과일 농장을 경영하려는 농업회사가 테라바(디키스) 강 삼각주 지역을 개간하는 과정에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학술적 연구도 바로 이어졌고, 이미 1943년에 이 유물들에 대한 연구 보고서가 나왔습니다. 1950년대에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고고학적 발굴 결과 함께 출토된 유물들은 이 석구들이 컬럼버스 이전 시기 코스타리카 남부에서 번영했던 토착문명의 유물들과
연관되어 있음을 시사했으며, 특별히 아틀란티스나 외계문명, 대서양 건너편과의 관계를 입증할 만한 증거들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코스타리카
남부 지도. 중앙부에 테라바 강이 보인다. 오른쪽의 회색 영토가 파나마)
사진#2
현재까지 보고된 석구들의 숫자는 약 300개로 작은 것은 지름 수 cm에서 큰 것은 2m에 이르는데 가장 무거운 것은 16톤에 달합니다. 석구들의 재료인 화강암이 채취된 곳은 탈라망카 산맥이었지만, 제조된 후 다시 수십 마일 떨어진 테라바(디키스) 강 삼각주 지대로 옮겨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상당수의 석구들이 보물 사냥꾼들에 의해 파괴되고(속에 금이 들었다는 소문이 돌았었음), 농민들이 개간하면서 파괴하고, 일부는 가정에 장식용 수집품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본래의 숫자는 보고된 개수보다 훨씬 많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화강암은 열팽창계수가 높은 석재로, 열과 급속냉각(찬물)을 가하여 대충 둥근 형태로 떼어낸 후 표면을 쪼거나 갈아서 구형으로 가공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코스타리카 석구 연구의 권위자인 캔사스대학 고고인류학과 존 W. 훕스(John W. Hoopes)교수의 추정에 의하면 이같은 과정은 레이저빔이나 외계문명의 기술, 심지어는 금속 도구조차 사용하지 않고도 원시적 가공 기술로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합니다.
석구와 함께 출토된 유물을 통한 연대 추정에 의하면 석구들은 AD 200~800년 사이에 번영했던 아구나스 부에나스(Agunas Buenas) 문화의 산물로 추정됩니다. 일부 석구들은 그보다 시대가 더 내려오며, 1800년대의 어느 시점까지도 제작이 계속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사진#3
(땅 속에 묻힌 석구)
사실 석구의 제작 연대보다는 석구들의 용도가 과연 무엇이었느냐가 미스터리입니다. 최초의 석구간
배열은 일직선 혹은 삼각형이나 평행선의 형태였을지도 모른다는 증거가 있고, 원형 그대로 남아 있는 4개의 석구가 정확히 자북(磁北)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 지구자기장과 뭔가 관련이 있는 물건이었을지도 모르나, 극소수의 석구들을 제외하고는 애초의 발굴 위치에서 벗어나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본래의 배치 상태를 알아내기 어렵습니다. 이스터 섬으로의 항해를 위한 등대 구실을 했다느니(지도 왼쪽 하단에 보이는 카뇨
섬에서도 약간의 석구 발견), 영국의 스톤헨지를 가리키고 있다느니 하는 주장들이 나온 바 있으나 현재 남아 있는 석구의 배치 위치만으로도 이러한
주장들은 근거가 없어 보입니다.
사진#4
(현존하는 가장 큰 석구 옆에서 기념촬영한 존 W. 훕스 교수)
석구의 미스터리에 대해 오해를 부채질한 부분 가운데
하나는 가공도입니다. 조지 에릭슨(George Erikson)은 이 석구들이 큰 것은 30톤이 넘고, 지름이 3m에 달하며 완전한 구체를 이루어
오차가 2mm 내외라고 했는데, 실제로는 가장 무거운 것이 16톤, 가장 큰 것의 지름은 2.15m에 그쳤고, 일부 석구에서는 지름 차이가
50mm에 달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아틀란티스 관련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추정하는 12000년 전의 유물이라는 증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석재의 경우 유기물처럼 탄소측정법을 사용할 수 없으므로 유물이 묻힌 지층의 다른 유물들과의 비교를 통해 연대를 추정하는 방법이 널리 사용되는데,
이 방법을 통한 연대는 AD 600~1500년으로 비정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