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공간

오만과 편견

시디따논당상 2006. 5. 21. 20:36

 

 

감독 : 조 라이트 (Joe Wright)
원작 : 제인 오스틴(Jane Austen)
주연 : 키이라 나이틀리(Keira Knightley)
음악: 다리오 마리아넬리 (Dario Marianelli)

 

 

Dawn / Jean-Yves Thibaudet /  English Chamber Orch

오만과 편견은 원작의 향기를 고스란히, 동시에 신선하게 되살리는 데 주력한 영화로

조 라이트 감독은 18세기 영국 시골의 풍경을 매혹적인 그림 처럼 담아내며

그 안에서 사랑의 줄다리기를 해야 하는 젊은 연인들의 심상을 좇는다.

결혼은 사업이다....

제인 오스틴의 명작 '오만과 편견'이 선구적인 고전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이 사실을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그것이 현실이지만 그렇게 될수록 전혀 행복하지 않다는 점까지도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어떤 남자와 결혼하느냐에 따라 향후 삶의 질이 결정된다고 여기며 살았던

18세기 사람들의 모습은 오스틴의 소설 속에 섬세하고도 유머러스하게 담겨 있다.

2005년 워킹 타이틀이 제작한 <오만과 편견>은 1940년 단 한 차례,

그리어 가슨과 로렌스 올리비에 주연으로 스크린에 옮겨졌던

제인 오스틴의 원작을 65년 만에 스크린으로 불러온 영화.....

영국 BBC 방송국이 만들었던 미니시리즈 오만과 편견이 워낙에 사랑 받았다고는 해도

TV 시리즈여서 극장용 <오만과 편견>에 대한 많은 이들의 갈 증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게다가 이 영원한 로맨스의 고전은 현대적으로 변형 브리짓 존스의 일기나

인도 영화 <신부와 편견>)하기만 해도 번번이 관객들의 환영을 받곤 하니

고전에 대한 완전정복을 노리지 않을 이유가 없다.

다아시역의 매튜 맥파튼(matthew macfadyen)...존 쿠색과도 많이 닮았다 .

 
Mrs. Darcy /Jean-Yves Thibaudet/ English Chamber Orch

그런 의미에서 2005년의 <오만과 편견>은 원작의 향기를 고스란히,

동시에 신선하게 되살리는 데 주력한 영화다.

시대극이라고는 가까이 해본 적이 없으며 오스틴의 원작에 대해

'오만과 편견'을 지니고 있던 TV 출신 신인 감독 조 라이트를

기용한 것부터가 남다른 일이다.

 

 

하드포셔 지방의 딸 부잣집 베넷 가에 희소식이 날아든다.

이웃에 부유한 가문의 신사 빙리가 훨씬 더 부유한 가문의 친구 다아시(매튜 맥파든)를

대동하고 이사를 왔다는 것.....

이건 곧 딸들 중 하나를 빙리와 엮을 기회라고 여긴

베넷 부인(브렌다 블레신)의 계획 때문에 베넷 가 사람들은 무도회에 참석한다.

무도회에서 큰 딸 제인과 빙리 사이에 야릇한 기류가 형성되고,

리지라는 애칭을 지닌 둘째 딸 엘리자베스(키이라 나이틀리)는

빙리의 친구 다아시를 만난다.

자존심 강한 리지는 오만하고 무뚝뚝한 그를 첫눈에 싫어하게 되지만

언니 제인과 빙리 때문에 계속 그와 부딪히면서

결국 자신의 편견과 다아시의 진심을 깨닫게 된다.

감독 조 라이트는 원작의 품격을 손상시키지 않는다.

18세기 영국 시골의 풍경을 너무도 아련하고 매혹적인 그림처럼 담아내며

그 안에서 사랑의 줄다 리기를 해야 하는 젊은 연인들의 심상을 좇는다.

 

영화의 오프닝, 빙리와 다아시가 등장하는 무도회 장면 등에서

주인공들을 따라 움직이는 카메라는 영화에 한결 우아함을 더한다.

부딪치는 눈길, 스치는 손끝에서 거의 싸우듯이 격렬하게 서로에 대한 감정을

고백하는 대사에 이르기까지 영화는 고전적 향취를 완성해낸다 .

시대의 공기를 붙잡기 위해 공들인 부분도 확연히 눈에 띈다.

당시를 재현한 가구와 소품 등 프로덕션 디자인, 리본과 레이스에 의미를 부여한 의상,

화면과 화면 사이로 파고드는 다리오 마리아넬리의 피아노 음악은

시대극 로맨스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요인들....

캐스팅도 A학점이라 할 만하다.

 

 

Leaving Netherfield / Jean-Yves Thibaudet /English Chamber Orch

 
 

리지와 다아시를 연기하는 두 주연배우 키이라 나이틀리와 매튜 맥퍼든이

만들어내는 성적 긴장감은 상당히 로맨틱하다.

다섯 딸들을 둔 아버지 미스 터 베넷 역의 도널드 서덜랜드,

모든 관심사가 딸들의 결혼 비즈니스에 쏠려 있는 베넷 부인 역의 브렌다 블레신,

권위로 뭉친 캐서린 영부인 역의 주디 덴치는 영화 속에서

들의 존재감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배우들은 물론 제작진 대부분이 오스틴 원작의 팬이어서 만들 수 있었던 이 영화를

18세기 신데렐라 스토리로 여긴다면 그것이야말로 편견이다.

오만과 편견은 순수하게, 뜨겁게 사랑했던 시절을 떠올리도록 재치와 유머를 발휘하는,

그래서 더없이 사랑스러운 영화다.

 

 

Arrival at Netherlield /Jean-Yves Thibaudet / English Chamber Orch

영국의 연기파 배우 캐서린 공작부인 역의 주디 덴치(Judi Dench)

 

 

Suite from Abdelazar (The Moor's Revenge)의 'Rondeau.

HENRY PURCELL (1659-1695)

The Academy of Ancient Music

 

 

A Postcard To Henry Purcell의 'Rondeau' OST(violin)

 
키이라 나이틀리는 영미권의 소녀들이 흔히 그렇듯 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을 여러 번 읽었다. 7세 때 '오만과 편견'을 테이프 형태의 오디오 북으로 접하고는 그 테이프를 마르고 닳도록 들었다. 11세 때는 배우 콜린 퍼스가 다아시 역을 맡아 스타덤에 오른 BBC의 TV 시리즈 <오만과 편견>에 푹 빠져들었다. 제대로 원작을 읽은 건 14세 때였다. 그 후로도 물론 여러 번 읽었으며 최근에 읽은 건 2003년 워킹 타이틀이 제작하는 영화 <오만과 편견>의 여주인공 엘리자베스 역을 제안 받고 나서였다. 책을 읽으면서 나이틀리는 점점 더 불안해졌다. 수많은 독자들이 어디 두고보자 할 엘리자베스를 연기하기엔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고민하고 있을 무렵 역시 오스틴의 팬이었던 어머니의 한마디가 도움이 됐다. "'오만과 편견'을 읽은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나만의 <오만과 편견>, 나만의 엘리자베스, 나만의 다아시를 지니고 있잖아. 나만의 엘리자베스를 연기하면 그게 모두의 엘리자베스인 거지." 우리 모두에게 있는 '오만과 편견', 우리 모두에게 있는 엘리자베스. 이것이 제인 오스틴의 고전 로맨스가 21세기의 스크린에 부활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시대를 초월한 오스틴 파워

'상당한 재산을 가진 독신 남성에게 아내가 필요하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이다.' 제인 오스틴이 쓴 <오만과 편견>의 첫 문장이다. 곧 이어 베넷 부인의 한마디가 등장한다. "여보, 네더필드 파크를 임대하겠다는 사람이 드디어 나타났대요. 그런 소식 들으셨어요?" 자연스럽게 등장인물을 소개하며 이 집이 딸들의 결혼에 가문의 사활을 걸고 있음을 말해주는 대사들로부터 얘기는 시작된다.

영화 <오만과 편견>은 제인 오스틴의 문장이 묘사하고 있지는 않지만 원작이 지닌 분위기를 오프닝으로 옮겨 단숨에 시선을 사로잡는다. 새벽의 회색 기운을 뚫고 한 줄기 빛으로부터 동이 터 오는 아침. 맑고 청명한 피아노 음악이 상쾌하게 귓속을 파고드는 가운데 카메라는 들판에서 책을 잃으며 걷고 있는 한 여성을 찾아낸다. 그리고 집으로 들어오는 그녀, <오만과 편견>의 주인공 엘리자베스를 따라잡더니 어느 새 집안으로 들어가 구석구석 베넷 가의 일상을 비춘다. 베넷 부인(브렌다 블레신)이 남편 베넷(도널드 서덜랜드)에게 이웃에 갑부 총각 빙리가 이사온다는 얘기를 하고 다섯 딸들이 환호하면서 딸 부잣집 베넷 가의 파란만장 결혼 공략기가 시작된다. 빙리가 나타날 것을 알고 마을 무도회에 참석한 베넷 가 사람들. 운 좋게도 순진한 미남 사업가 빙리(사이몬 우즈)는 베넷 가의 큰딸 제인(로자문드 파이크)에게 끌리고 리지라는 애칭을 지닌 둘째 엘리자베스(키이라 나이틀리)는 빙리와 함께 온 친구 다아시(매튜 맥퍼딘)를 만난다. 리지는 빙리보다 더 부자라는 다아시의 오만한 태도에 초반부터 자존심이 상하는데, 한 술 더 떠 그가 빙리에게 자신의 외모를 평가하는 말을 듣게 된다. "봐줄 만하지만 날 매료시킬 정도는 아냐." 상처 입은 리지와, 말과는 달리 틈날 때마다 리지를 바라보는 눈길이 예사롭지 않은 다아시는 사사건건 부딪치면서 서로 끌리는 마음을 애써 부인한다.

소설 <오만과 편견>이 출간된 지 200년이 넘었다. 원작자 제인 오스틴은 1775년 영국 햄프셔의 작은 시골 마을 스티벤튼에서 교구 목사인 아버지와 어머니가 낳은 6남 2녀 가운데 둘째 딸이자 일곱 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그가 첫 장편소설 <첫인상>을 완성한 건 21세였던 1797년. <첫인상>을 쓰기 시작한 건 첫사랑 상대와의 결혼이 남자 집안의 반대로 무산된 후였다. 오스틴의 아픈 경험이 반영된 처녀작 <첫인상>은 바로 출판되기는커녕 출판사로부터 차갑게 외면당했다. 이후 1811년 <센스 앤 센서빌러티>가 출판돼 호응을 얻자 <첫인상>은 1813년 <오만과 편견>으로 제목을 바꿔 겨우 빛을 보게 됐다. <오만과 편견> 이후 <맨스필드 파크> <엠마>까지 오스틴의 작품들은 출간될 때마다 성공을 거뒀다. 그의 소설 속의 환경은 자신의 환경과 비슷했고 특히 자신이 겪었던 시대의 구속을 <오만과 편견>의 리지와 베넷 가족을 통해 풍자했다. 오스틴은 리지를 자유롭게 자신을 표출하는 동시에 신분, 물질, 남성의 권력에 귀속된 당대 젊은 여성들의 좌절감을 보여주는 캐릭터로 만들었다. 결혼하고 싶은 사람을 선택할 수 없고, 부유한 삶을 살고 싶다면 원치 않는 결혼이라는 대가를 받아들여야 했던 시대의 여성 작가 오스틴의 현실이 바탕이 된 <오만과 편견>은 어머니에게서 딸을 거쳐 손녀에게로, 다양한 인종,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에게 사랑 받아왔다.

영국 로맨틱 코미디의 명가 워킹 타이틀은 바로 이 사실을 주목했다. 재미있는 건 워킹 타이틀의 흥행 로맨틱 코미디들이 늘 제인 오스틴의 세계에 빚을 져왔다는 사실이다. 워킹 타이틀의 공동 대표이자 <오만과 편견>의 프로듀서인 팀 베번도 그 점을 인정했다. "우린 오스틴의 소설에서 힌트(즉, 세대를 초월한 남녀 사이의 '오만과 편견')를 얻어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 <노팅 힐> <브리짓 존스의 일기>를 제작해왔다. 이젠 오리지널 작품을 관객에게 선보일 때가 됐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오만과 편견>을 현대적으로 변형한 작품들(<브리짓 존스의 일기>나 <오만과 편견>의 인도식 버전 <신부와 편견>)은 흥행에 성공했다. 게다가 <엠마> <센스 앤 센서빌러티> <맨스필드 파크>까지 오스틴이 내놓았던 화제의 소설들은 대부분 영화화됐고 모두 평단과 관객의 환영을 받았다. 이쯤 되면 오스틴의 대표작이자 출세작인 <오만과 편견>을 오리지널 그대로 살리고 싶다는 욕망이 생겨나는 것도 당연하다.

2003년 워킹 타이틀의 공동대표 팀 베번과 에릭 펠너는 <오만과 편견> 클래식 부활 프로젝트의 잠재력을 깨닫고 제작을 결정했다. 그 해 11월 데보라 모가치가 각본을 썼고, 조 라이트가 그 시나리오를 받아보게 됐다. 문제의 감독 조 라이트는 <오만과 편견>으로 장편 데뷔하기 전까진 주로 TV에서 일했다. 33세의 젊은 감독이 주디 덴치, 도널드 서덜랜드, 브렌다 블레신 등의 중견배우들과 키이라 나이틀리 같은 스타급 여배우를 거느렸다는 건 워킹 타이틀이 즐겨하는 파격 조치가 아니면 불가능했다. 사회적이고 현실적인 드라마를 연출해왔던 라이트는 <오만과 편견>의 시나리오를 볼 때까지도 오스틴의 원작은 들춰본 적이 없던 상태였다. 하지만 "<오만과 편견>에 대한 심한 편견의 소유자"이자 허례 허식에 차 있다는 이유로 시대극을 폄하했던 그가 <오만과 편견>의 연출을 맡은 것이야말로 환상적인 시대극 로맨스가 탄생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라이트는 "시나리오를 억지로 읽기 시작했는데 믿을 수 없을 만큼 그 세계에 빠져들었다. 그 후 원작까지 읽었는데 새롭고 젊은 에너지로 가득하다는 느낌에 흥분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왜 지금 제인 오스틴이 필요한가?" 라는 사람들의 질문에 이렇게 답하게 됐다. "끊임없이 이야기될 스토리이기 때문이다. 65년 전 로렌스 올리비에, 그리어 가슨 주연으로 한 차례 영화화된 걸 제외하곤 만들어진 적도 없다. <오만과 편견>의 영화 버전을 하나 더 가질 때가 됐다."

문장과 문장 사이를 화면으로

영화 <오만과 편견>의 줄거리 자체는 매우 충성스러울 만큼 원작의 이야기를 따라간다. 오스틴이 써놓은 등장인물들의 몇 차례의 만남을 한 번에 압축시키거나 다소 들어내면서 베넷 가 사람들을 둘러싼 이야기를 그려낸다. 그런데 그 풍경이 가슴이 두근거릴 만큼 서정적이고 로맨틱하다. 예상치 못했던 매혹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와 닿는 감정의 흐름이 영화 내내 흘러 넘친다. 그건 이 영화가 인물들의 내면에 밀착해 있기 때문이다. 2005년 버전 <오만과 편견>은 200년 전 오스틴이 써 내려간 문장 하나를 하나의 컷, 하나의 신으로 만들어내며 문장과 문장 사이, 장과 장 사이를 눈으로 보게 한다.

아주 대표적이 장면이 있다. 빙리의 집에 초대된 언니 제인이 감기로 앓아 누워 돌아오지 못하자 리지는 아픈 언니를 찾아간다. 원작에는 리지가 마차가 없고 말을 탈 줄 몰라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고 적혀 있지만 카메라는 그 후의 이미지, 저 멀리 비 내린 후 회색 빛 하늘 밑에서 진창길이 된 들판을 가로질러 혼자 걸어가는 리지의 모습을 롱 샷으로 담아낸다. 눈앞이 아련해진다. 아직 자신의 사랑과 운명을 예측하지 못하는 스무 살 리지의 걸음은 씩씩하면서도 조금은 쓸쓸하고 외롭다. 이야기가 흘러가고 말하지 않아도 온전히 이해되는 한 장면 한 장면들이 그 사이를 채우면서 <오만과 편견>의 매혹은 쌓여간다. 카메라는 유려하고 우아하게 움직여 인물들의 감정과 그 시대의 공기 속으로 다가간다. 친구 샬롯이 유복한 삶을 보장받기 위해 볼 품 없는 목사 콜린스와 정략 결혼을 하게 됐다고 말하고 떠나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리지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다가 트랙킹 숏으로 베넷 가 주변 풍경을 훑는다. 소 떼를 모는 하인들, 굴뚝의 연기, 노을진 하늘의 색감이 평온한 듯 보이지만 복잡한 리지의 심경을 전한다. 빙리 가가 주최한 무도회 장면에서 베넷 가 사람들을 따라잡던 카메라가 방과 방 사이를 돌아다니다가 다아시와 춤을 추고 난 후 마음이 상해 벽 뒤에 숨은 리지를 찾아낸다. 영화평론가 로저 에버트가 "루치노 비스콘티의 <레오파드> 중 무도회장 신이 떠오른다"고 평한 이 장면에서 카메라는 롱테이크 원 샷으로 움직이며 하나의 장면, 하나의 문장을 만든다. 감독 조 라이트는 "오스틴은 사회적인 대화에서 인간 본성을 관찰했기에 영화에선 인물들의 클로즈업을 많이 사용했다.

또한 오스틴은 막대한 에너지와 열정으로 글을 쓴 젊은 여성이었기에 카메라도 그렇게 움직이길 원했다"고 설명한다. <오만과 편견>의 조용한 힘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다아시에 대한 오해를 풀게 된 리지가 꿈을 꾸듯 절벽에 올라 서 있는 장면, 이모 부부와 함께 다아시의 저택을 방문했을 때 조각상들 사이에 서 있는 장면에선 마치 다아시의 마음속으로 젖어드는 것 같은 찰나의 순간, 지나친 편견으로 사랑을 잃었다는 상실의 감정과 심정의 동요를 화면으로 빚어낸다. 조 라이트의 <오만과 편견>이 매력적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제인 오스틴이 써내려 간 원작의 문장들은 대부분 등장인물들의 심리를 묘사한 것이었고 영화는 그것에 집중한다. 캐릭터의 성격이나 시대적 상황을 드러내기보다는 그들의 마음을 쫓고 있는 것이다.

오스틴은 자신이 살던 시대, 자신의 친구들을 위해서 소설을 썼다. 사회 문제에 대한 비판이나 고발과는 거리가 먼 작품 세계를 유지하며 주로 시골 중산층 혹은 상류층 가정의 집안의 일들을 다뤘기 때문에 후대 비평가들로부터 '응접실 소설'이라는 비아냥을 얻기도 했다. 제인 오스틴의 글에는 확실히 어떤 명분 같은 게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차와 과자가 나오는 응접실에 앉아서도 시대를 이해할 수 있는 힘을 보여준다. 영화는 그 점을 살려낸다. 카메라는 집안에서 걸어나가 영국 시골의 풍요로운 정경을 담는다. "베넷 가문이 그들이 사는 곳의 자연과 얼마나 근접해 살아가고 있었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다"는 감독의 바람이기도 했지만 그건 단순히 풍경을 보여주는 것 이상이다. 시대 속으로 들어가도록 놓여진 다리처럼 그 행간의 화면들이 보는 이의 마음을 사정없이 끌어당긴다. 그 위에 클래식 작곡가 다리오 마리아넬리의 피아노 음악들이 프랑스 피아니스트 장 이브 티보데의 매혹적인 연주로 불어오는 바람처럼 사뿐히 내려앉는다. 촉촉하게 비가 내린 저녁, 푸른 안개에 쌓인 새벽녘의 희미함, 오감을 자극하는 교외의 풍경이 입밖에 내서 말하지 않는 리지와 다아시의 내면을 대변한다. 원작의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상당히 밝고 반짝거렸기 때문에 다소 그늘을 첨가한 <오만과 편견>은 그래서 원작과 또 다른 품격을 얻는다. 그리고 그 풍경 안에서 감정이 무르익는다.

다아시와 리지는 작정하고 서로를 치고 받으며 격하게 충돌한다. 무도회의 군중들 어깨 너머로 부딪치는 눈길, 마차에 오를 때 스치는 손길. 뻔히 보이지만 연애의 줄다리기는 흥미롭다. 다아시는 자신이 리지를 좋아하는 사실 때문에 어쩔 줄을 모른다. 리지의 마음속엔 자신에게 첫눈에 반하지 않은 다아시를 못마땅해 하는 허영심과 진실한 사랑을 찾는 순수함이 공존한다. 그런 리지를 지켜보던 다아시는 급기야 열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리지에게 격렬하게 고백해버리고 만다. 두 젊음이 부딪치는, 비 내리는 야외에서의 프로포즈 신은 더할 나위 없이 로맨틱하다. 언니 제인과 빙리 사이를 떼어놓은 장본인이 다아시라는 사실에 화가 나있던 리지는 다아시의 프로포즈를 단호하게 거절하고 그 거절에 다아시도 상처 입는다. 하지만 둘 사이에 형성된 강렬한 성적 긴장감은 차가운 비가 내뿜는 공기에 실려 화면 밖으로까지 번져 나온다. 리지가 다아시의 친척인 캐서린 영부인에게 모욕을 당한 후 잠 못 이루고 새벽녘 산책을 하다가 다아시를 만나는 클라이맥스도 단연 백미다. 첫사랑의 먹먹한 감정이 눈으로 확인되는 순간, 저 멀리서 안개를 헤치고 걸어오는 다아시의 모습은 떨리는 가슴으로 만나는 로맨스의 정수를 실현한다.

시대를 무시하고 시대를 되살리는

2004년 여름에 촬영한 <오만과 편견>은 그저 예쁘게가 아니라 아름답게, 감상적인 게 아니라 로맨틱하게 만들어지기 위해 다방면의 노력을 기울였다.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는 시대극을 만들어내는 것이 관건이었기에 <오만과 편견>은 시대극의 전형을 상당 부분 무시하면서도 시대극의 디테일을 풍성하게 살려내는 영화로 완성됐다. 그 노력 중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역시 젊은 에너지다. 1940년 작 <오만과 편견>을 찍을 당시 극중 28세인 다아시를 연기한 로렌스 올리비에와 20세인 엘리자베스를 연기한 그리어 가슨은 30대였다. 그때야 그랬다지만 2004년에도 생애 처음으로 사랑에 빠지는 남녀의 이야기를 나이 많은 관록의 배우들과 만들다간 <오만과 편견>이 <40살까지 못해본 남자>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원작의 신선함을 되살리기 위해 원작 설정과 같은 나이 대의 젊은 얼굴을 찾는 것이 <오만과 편견> 제작의 첫 번째 과제였다.

자존심 강한 리지와 오만 덩어리 다아시의 격렬한 관계를 연기해줄 두 주연배우 캐스팅은 의외의 선택이었다. 여성스러우면서도 말괄량이 기질이 다분하고 쾌활한 이미지의 키이라 나이틀리가 리지 역에, 야들야들한 꽃미남 과와는 전혀 거리가 멀고 남성적인 매력이 풍기는 29세의 배우 매튜 맥퍼딘이 다아시 역에 캐스팅됐다. 배우들은 당시의 시대의 관습과 분위기를 이해하기 위해 역사가들의 강의를 들었고, 에티켓 레슨을 받았다. 여기에, 베테랑 연기자들과 스타급 배우, 절묘한 신구 캐스팅의 혼합 또한 <오만과 편견>의 강점으로 작용했다. 다섯 딸들을 데리고 사는 기묘한 성품의 아버지 베넷의 변덕과 냉소를 연기하는 도널드 서덜랜드, 딸들 혼사 문제에 올인하는 만화 캐릭터 같은 베넷 부인 역의 브렌다 블레신, 온몸에서 권위 의식을 뚝뚝 흘리는 다아시의 친척 캐더린 영부인 역의 주디 덴치가 경쾌한 연기를 보여주는 젊은 배우들과 훌륭한 조화를 이룬다. 감독 조 라이트는 "TV 작업 때 스탭들은 대략 80명 정도였는데 <오만과 편견> 촬영 첫날 현장에 갔더니 300명 넘는 스탭들이 있었다. 테이블 상석에 주디 덴치가 앉아 있었다. 정말 무서웠다!"며 엄살을 떨었다지만 영화의 어디에서도 주눅 든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다.

라이트가 "캐릭터들이 연기하는 세계의 360도 전부를 만들어내고 싶다"는 이유로 프로듀서들을 괴롭혀 원작에 언급된 실제 지역에서 로케이션을 감행한 것도 시대극의 디테일을 살려낸 중요 요인이 됐다. 베넷 가의 집, 다아시의 저택, 캐서린 영부인의 저택 등 각 집의 풍모는 18세기 사람들의 사회적 위치, 재산 규모, 캐릭터의 성격을 대변한다. 영국 남동부 켄트의 시골에 위치한 그룸브릿지 플레이스의 17세기 영주 저택이 촬영지로 선택됐다. 다아시의 저택, 캐서린 영부인의 저택이 화려하기 그지없다면 베넷 가의 집은 다소 서민적이다. 곳곳에 문이 달려서 밖의 풍경이 마치 집안으로 들어오는 듯한 깊이감을 담아낸다. 부엌에 얼쩡대는 돼지, 집안에서 소녀들이 걸을 때마다 나무로 된 바닥의 울림과 스치는 소리, 그리 새 것처럼 보이지 않는 의상들. 관객에게 거칠고 마치 만져질 것 같이 생생한 질감을 지닌 영국 시골의 삶이 화면 속에 되살아난다. 카메라는 집 바깥의 풍경 못지 않게 집안의 풍경도 와이드하게 잡아내며 그 속에 공들인 디테일을 관객들로 하여금 속속들이 확인하게 만든다.

원작이 19세기 초에 출판되긴 했지만 실제로 쓰여진 건 1797년, 즉 18세기 후반이라는 사실은 <오만과 편견>의 많은 볼거리들의 형태를 결정지었다. 18세기 후반의 중요했던 사회적 반향을 영화의 세세한 부분에까지 담으려고 노력한 것이다. 빙리의 누이 등 상류층 사람들은 18세기 후반 프랑스 혁명 이후 유행한 하이 웨이스트의 일자 엠파이어 라인 드레스를 입고 있는데 반해 가난한 베넷 가의 딸들은 허리 라인이 훨씬 아래로 내려와 있는 드레스를 입는 식이다. 그 속에서 줄무니 드레스를 입거나 부츠를 신고 다니는 리즈의 캐릭터는 더욱 튈 수밖에 없다. 심지어 시대극이면서도 등장인물들이 말을 타는 모습도 단 한 장면밖에 나오지 않는다. 말타기를 없애고, 코르셋을 걷어버리는 디테일은 시대상에 비추더라도 색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시대극이라는 사실을 때로는 잊을 만큼, 때로는 결코 잊지 못할 만큼 21세기 <오만과 편견>엔 신선한 공기가 가득하다.

영원한 고전 로맨스의 향취

워킹 타이틀의 <오만과 편견>은 머천트 아이보리 사단의 <전망 좋은 방> <하워즈 엔드> <남아있는 나날> 같은 시대극이나 이안의 <센스 앤 센서빌러티>와는 또 다른 시대극의 정서와 형태를 보여준다. 얄미울 만큼 우아하고 사랑스럽고 모든 것이 그저 자연스럽다. 시대극의 외피는 일정한 거리감으로 그들 세상의 희로애락, 어쩌면 너무도 소소한 로맨스를 즐겁게 구경하게 한다. 감독 조 라이트는 "사람들은 여전히 사랑에 빠지고, 타인에게 질투를 느끼며, 종종 지나치게 오만하다. <오만과 편견>은 그런 사람들에게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법을 알려주는 러브스토리"라고 말한다. 동감이다. <오만과 편견>은 남성 관객보다는 여성 관객을 더 매료시킬 거라는 편견과 달리 사랑의 감정을 느껴본 이들이라면 누구에게나 그 설레임을 떠올리게 할 영화다. 오만한 듯 다정한 다아시, 세련된 위트와 지적인 매력을 지녔지만 동시에 미래가 새겨진 지도를 얻지 못해 자신의 운명을 찾아 헤매는 리지는 낯설지 않으며 친근하다. 닫혀진 문 뒤에서는 전혀 다르게 행동하는 사람들이 살던 시대, 부모님이 보는 앞에서 춤을 춰야 하는 18세기식 초스피드 맞선 자리에서 주책 맞은 엄마, 남자에게 목매단 여동생들을 대동하고 사랑에 빠지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는 건 지금도 여전히 흥미롭다. 원작을 읽지 않고 영화를 본 이들에게는 원작을 손에 들고픈 욕망도 가질 만하다. <오만과 편견>의 첫인상이 고리타분한 시대극이라고 느꼈다면 그 생각은 곧 바뀌게 될 것이다. 영원한 고전 로맨스의 향기는 이렇게 우리의 심장을 설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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